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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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는 1898년 독일에서 태어나 1970년 사망한 독일의 소설가이다. 그는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경험을 바탕으로 한 소설 《서부 전선 이상 없다》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으며, 전쟁과 전후 독일 사회를 다룬 작품들을 발표했다. 나치 정권의 탄압을 피해 망명 생활을 했으며, 그의 작품은 전쟁의 참혹함과 인간성을 다룬 중요한 문학 유산으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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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 - 폴렛 고더드
폴렛 고더드는 모델 활동을 시작으로 할리우드에서 배우로 성공했으며, 찰리 채플린 영화 출연, 파라마운트 픽처스와 계약 후 다양한 영화 주연, 그리고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의 배우자로서 그의 재산을 상속받아 사회 사업에 기여한 미국의 배우이자 재력가이다. - 오스나브뤼크 출신 - 올라프 숄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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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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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 |
출생 이름 | 에리히 파울 레마르크 |
출생일 | 1898년 6월 22일 |
출생지 | 독일 제국 프로이센 왕국 오스나브뤼크 |
사망일 | 1970년 9월 25일 |
사망지 | 스위스 로카르노 |
직업 | 소설가 |
국적 | 독일 제국 (1898년–1938년) 무국적자 (1938년–1947년) 미국 (1947년–1970년) |
배우자 | 일제 유타 잠보나 (1925년–1930년, 이혼) 일제 유타 잠보나 (1938년–1957년, 이혼) 폴레트 고더드 (1958년) |
작품 활동 | |
활동 기간 | 1929년–1970년 |
장르 | 전쟁 소설 사회 풍자 |
주요 작품 | 서부 전선 이상 없다 개선문 사랑할 때와 죽을 때 |
수상 | |
수상 | 독일 연방 공화국 공로 훈장 대십자장 |
기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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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 괴테 인스티투트 영국 |
2. 생애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는 1898년 6월 22일 독일 오스나브뤼크에서 로마 가톨릭 노동자 계급 가정의 에리히 파울 레마르크(Erich Paul Remark)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3] 아버지는 제본사 피터 프란츠 레마르크, 어머니는 안나 마리아(옛 성씨는 슈탈크넥트)였다.[3] 그는 네 자녀 중 셋째였으며, 누나 에르나, 일찍 사망한 형 테오도르 아르투르, 여동생 엘프리데가 있었다.[5] 아버지와는 친하지 않았지만 어머니와는 가까웠으며, 제1차 세계 대전 후 어머니를 기리기 위해 중간 이름을 '마리아'로 사용했다.[4]
레마르크의 증조부 요한 아담 레마르크(Johann Adam Remarque)는 1789년 아헨의 프랑스 가정 출신이었다.[7] 그의 할아버지가 19세기에 성을 레마르크(Remarque)에서 레마르크(Remark)로 바꾸었으며,[6] 훗날 레마르크는 자신의 프랑스계 조상을 기리고 이전 소설 《꿈의 방(Die Traumbude)》과 차별성을 두기 위해 《서부 전선 이상 없다》를 출판할 때 다시 레마르크(Remarque)로 바꾸었다.[13]
18세에 독일 제국군에 징집되어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다.[10] 1917년 6월 12일 서부 전선에 배치되어 제2근위 예비사단 예비대대 제2중대에 소속되었다.[10] 같은 해 6월 26일에는 제15예비보병연대 제2중대 공병소대 베테(Bethe)로 배속되어 토르하우트와 후트훌스트 사이 참호에서 전투를 치렀다.[10] 7월 31일, 포탄 파편에 의해 왼쪽 다리, 오른쪽 팔, 목에 부상을 입고 뒤스부르크의 군 병원으로 후송되어 치료를 받았다.[10] 1918년 10월 군 복무에 복귀했으나, 휴전으로 인해 참전은 끝을 맺었다.[10]
전쟁이 끝난 후, 교사 교육을 계속하여 1919년 8월 1일부터 당시 링겐 군(현재 벤트하임 군) 비트마르셴의 초등학교 교사로 일했다.[40] 1920년 5월부터는 과거 흄링 군(현재 엠스란트(Emsland)) 클라인 베르센(Klein Berssen)에서, 1920년 8월부터는 나네(Nahne)에서 근무하다가 1920년 11월 20일 교직에서 휴직했다. 이후 사서, 사업가, 기자, 편집자 등 여러 직업을 전전했으며, 그의 첫 유료 집필 일은 독일 타이어 제조업체인 콘티넨탈 고무 회사의 기술 작가였다.[11] 1923년부터 1926년 사이에는 콘티넨탈 AG가 발행한 잡지 『에코 콘티넨탈』에 헤르만 슈츠가 그림을 그린 만화 시리즈, 『Die Contibuben』을 연재했다.[12]
16세에 처음 글쓰기를 시도하여 에세이, 시, 그리고 1920년에 출판된 장편소설 『꿈의 방』(독일어: Die Traumbude)의 초고 등을 썼다. 전쟁의 잔혹함과 어머니의 죽음은 그에게 큰 정신적 충격과 슬픔을 안겨주었고, 이후 어머니를 기리기 위해 중간 이름을 "파울" 대신 "마리아"로 사용하기 시작했다.[5] 또한, 『서부 전선 이상 없다』(독일어: Im Westen nichts Neues)를 출판했을 때, 『꿈의 방』과의 연관성을 없애기 위해 자신의 성을 이전 철자(Remark)에서 Remarque로 되돌렸다.[13]
1927년, 그는 소설 『지평선의 역』(독일어: Station am Horizont)을 스포츠 잡지 『Sport im Bild』에 연재했으며(1998년에 책으로 출판), 같은 해 그의 대표작인 『서부 전선 이상 없다』(독일어: Im Westen nichts Neues)(1929)를 썼다. 레마르크는 처음에 이 작품을 출판할 곳을 찾지 못했다.[3] 이 소설은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군 병사들의 경험을 묘사한 것으로, 출판되자마자 국제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20세기 문학의 획기적인 작품이 되었다. 이 작품은 전쟁에 대한 참전 용사들의 글쓰기라는 새로운 장르를 만들었고, 독일뿐만 아니라 영국과 미국 등 전쟁에서 독일 제국과 싸운 국가들의 극장과 영화에서 전쟁의 극적인 묘사를 불러일으켰다.
『서부 전선 이상 없다』의 성공에 힘입어 이와 유사한 여러 작품을 발표했다. 간결하고 감동적인 언어로 전쟁과 전후 독일의 모습을 묘사했으며, 1931년, 『귀환』(독일어: Der Weg zurück)을 완성한 후, 작품으로 얻은 상당한 부를 가지고 스위스 론코에 있는 빌라(카사 몬테 타보르)를 구입했다.
1933년 5월 10일, 나치 선전부 장관 요제프 괴벨스의 주도로 레마르크의 작품은 공개적으로 "반애국적"으로 선언되었고 독일에서 금서로 지정되었다.[14] 모든 도서관에서 그의 책이 제거되었고, 독일 전역에서 판매나 출판이 금지되었다. 독일을 떠나 스위스의 빌라에서 살았다. 그의 프랑스계 배경과 가톨릭 신앙도 나치들에 의해 공개적으로 공격받았다.[14] 그들은 그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을 계속 비난하며, 독일식 이름 "Remark"을 프랑스식 "Remarque"로 바꾼 사람은 진정한 독일인이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14] 나치는 또한 레마르크가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실제로 복무하지 않았다는 거짓 주장을 했다.[14] 1938년 레마르크의 독일 국적이 박탈되었다.[14] 1939년, 그는 전처와 재혼하여 그녀의 독일 송환을 막았다.[14] 유럽에서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기 직전, 그들은 스위스 포르토 론코를 떠나 미국으로 갔다.[14] 그들은 1947년에 미국 시민권을 획득했다.[15]
1943년 나치는 독일에 남아 남편과 두 자녀와 함께 살고 있던 그의 여동생 엘프리데 숄츠를 체포했다.[17] 악명 높은 인민재판소(인민재판소)에서 재판을 받은 후, 그녀는 전쟁에서 패배했다고 생각한다는 발언으로 "사기를 저하시켰다"는 죄목으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17] 재판장 롤란트 프라이슬러는 "당신의 오빠는 불행히도 우리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지만, 당신은 도망칠 수 없습니다"라고 선고했다.[17] 숄츠는 1943년 12월 16일에 처형되었다.[17] 레마르크는 나중에 그의 여동생이 반나치 저항 활동에 참여했다고 말했다.[18] 망명 중이던 레마르크는 전쟁 후까지 여동생 엘프리데의 운명을 알지 못했다. 그는 1952년 소설 『생명의 불꽃』(독일어: Der Funke Leben)을 그녀에게 바쳤다.[19] 이 헌정은 독일어판에서는 생략되었는데, 일부 독일인들에게 그녀가 여전히 반역자로 여겨졌기 때문이라고 한다.[19]
1948년, 스위스로 돌아와 여생을 보냈다.[20] 《개선문》과 다음 작품인 《생명의 불꽃》(''Der Funke Leben'') 사이에는 7년의 공백이 있었다.[20] 《생명의 불꽃》은 1952년 독일어와 영어로 출판되었다.[20] 그는 《생명의 불꽃》을 집필하는 동안 《살아야 할 시간과 죽어야 할 시간》(''Zeit zu leben und Zeit zu sterben'')도 집필했다.[20] 이 작품은 1954년 《사랑할 시간과 죽을 시간》(''A Time to Love and a Time to Die'')이라는 제목으로 영어로 번역되어 출판되었다.[20] 1958년, 더글러스 서크는 레마르크의 소설을 바탕으로 영화 《사랑할 시간과 죽을 시간》을 감독했으며, 레마르크는 이 영화에서 나치를 피해 숨어 사는 존경받는 교사 역으로 출연했다.[20]
1955년, 히틀러의 베를린 총통 관저 지하벙커에서의 마지막 날을 다룬 오스트리아 영화 《마지막 행위》(''Der letzte Akt'')의 시나리오를 썼다.[20] 이 영화는 마이클 머스마노의 책 《죽음까지 10일》(''Ten Days to Die'')을 바탕으로 했다. 1956년에는 무대극 《순환》(''Die letzte Station'')을 집필했으며, 이 작품은 독일과 브로드웨이에서 공연되었다. 《하늘은 편애하지 않는다》(''Heaven Has No Favorites'')는 1959년 《빌린 생명》(''Borrowed Life'')이라는 제목으로 연재된 후 1961년 단행본으로 출판되었고, 1977년 영화 《바비 디어필드》(''Bobby Deerfield'')로 제작되었다. 1962년에 출판된 《리스본의 밤》(''Die Nacht von Lissabon'')은 레마르크가 완성한 마지막 작품이다.
1925년 무용수 율타 일제 잠보나(Jutta Ilse Zambona)와 결혼했다가 1930년 이혼했고, 1938년에 그녀와 다시 결혼하여 1957년까지 함께 했다. 그는 마를레네 디트리히, 그레타 가르보 등과 염문을 뿌렸고, 1958년에는 찰리 채플린의 전처이자 여배우인 폴렛 고다르와 결혼했다. 1970년9월 25일, 스위스 로카르노에서 동맥경화증으로 인한 대동맥류로 사망하여 Ronco sopra Ascona에 매장되었으며, 1990년 사망한 아내 폴렛 고다르도 그의 옆에 묻혔다.
2. 1. 초기 생애 (1898-1916)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는 1898년 6월 22일 독일 오스나브뤼크에서 로마 가톨릭 노동자 계급 가정의 에리히 파울 레마르크(Erich Paul Remark)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3] 아버지는 제본사 피터 프란츠 레마르크, 어머니는 안나 마리아(옛 성씨는 슈탈크넥트)였다.[3] 그는 네 자녀 중 셋째였으며, 누나 에르나, 일찍 사망한 형 테오도르 아르투르, 여동생 엘프리데가 있었다.[5] 아버지와는 친하지 않았지만 어머니와는 가까웠으며, 제1차 세계 대전 후 어머니를 기리기 위해 중간 이름을 '마리아'로 사용했다.[4]레마르크의 증조부 요한 아담 레마르크(Johann Adam Remarque)는 1789년 아헨의 프랑스 가정 출신이었다.[7][36] 그의 할아버지가 19세기에 성을 레마르크(Remarque)에서 레마르크(Remark)로 바꾸었으며,[6] 훗날 레마르크는 자신의 프랑스계 조상을 기리고 이전 소설 《꿈의 방(Die Traumbude)》과 차별성을 두기 위해 《서부 전선 이상 없다》를 출판할 때 다시 레마르크(Remarque)로 바꾸었다.[13]
레마르크 가족은 가톨릭을 믿었으며,[37] 경제적으로 풍족하지 않았지만 레마르크는 학업에 뛰어났다. 김나지움에 진학하여 학업에 매진했으며, 16세부터 시 창작과 문예 활동을 했다.
2. 2.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1916-1918)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는 18세에 독일 제국군에 징집되어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다.[10] 1917년 6월 12일 서부 전선에 배치되어 제2근위 예비사단 예비대대 제2중대에 소속되었다.[10] 같은 해 6월 26일에는 제15예비보병연대 제2중대 공병소대 베테(Bethe)로 배속되어 토르하우트와 후트훌스트 사이 참호에서 전투를 치렀다.[10] 7월 31일, 포탄 파편에 의해 왼쪽 다리, 오른쪽 팔, 목에 부상을 입고 뒤스부르크의 군 병원으로 후송되어 치료를 받았다.[10][39] 1918년 10월 군 복무에 복귀했으나, 휴전으로 인해 참전은 끝을 맺었다.[10]2. 3. 전후 혼란과 작가 데뷔 (1919-1929)
전쟁이 끝난 후,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는 교사 교육을 계속하여 1919년 8월 1일부터 링겐 군(현재 벤트하임 군) 비트마르셴의 초등학교 교사로 일했다.[40] 1920년 5월부터는 흄링 군(현재 엠스란트(Emsland)) 클라인 베르센(Klein Berssen)에서, 1920년 8월부터는 나네(Nahne)에서 근무하다가 1920년 11월 20일 교직에서 휴직했다. 이후 사서, 사업가, 기자, 편집자 등 여러 직업을 전전했으며, 그의 첫 유료 집필 일은 독일 타이어 제조업체인 콘티넨탈 고무 회사의 기술 작가였다.[11] 1923년부터 1926년 사이에는 콘티넨탈 AG가 발행한 잡지 『에코 콘티넨탈』에 헤르만 슈츠가 그림을 그린 만화 시리즈, 『Die Contibuben』(독일어)을 연재했다.[12]레마르크는 16세에 처음 글쓰기를 시도하여 에세이, 시, 그리고 1920년에 출판된 장편소설 『꿈의 방』(독일어: Die Traumbude)의 초고 등을 썼다. 전쟁의 잔혹함과 어머니의 죽음은 그에게 큰 정신적 충격과 슬픔을 안겨주었고, 이후 어머니를 기리기 위해 중간 이름을 "파울" 대신 "마리아"로 사용하기 시작했다.[5] 또한, 『서부 전선 이상 없다』(독일어: Im Westen nichts Neues)를 출판했을 때, 『꿈의 방』과의 연관성을 없애기 위해 자신의 성을 이전 철자(Remark)에서 Remarque로 되돌렸다.[13]
1927년, 그는 소설 『지평선의 역』(독일어: Station am Horizont)을 스포츠 잡지 『Sport im Bild』(독일어)에 연재했으며(1998년에 책으로 출판), 같은 해 그의 대표작인 『서부 전선 이상 없다』(독일어: Im Westen nichts Neues)(1929)를 썼다. 레마르크는 처음에 이 작품을 출판할 곳을 찾지 못했다.[3] 이 소설은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군 병사들의 경험을 묘사한 것으로, 출판되자마자 국제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20세기 문학의 획기적인 작품이 되었다.[41] 이 작품은 전쟁에 대한 참전 용사들의 글쓰기라는 새로운 장르를 만들었고, 독일뿐만 아니라 영국과 미국 등 전쟁에서 독일 제국과 싸운 국가들의 극장과 영화에서 전쟁의 극적인 묘사를 불러일으켰다. 31세의 나이에 인기 작가의 반열에 올랐으며, 여러 언어로 번역되었고, 이듬해에는 할리우드에서 영화화되어 아카데미상을 수상했다.
『서부 전선 이상 없다』의 성공에 힘입어 레마르크는 이와 유사한 여러 작품을 발표했다. 간결하고 감동적인 언어로 전쟁과 전후 독일의 모습을 묘사했으며, 1931년, 『귀환』(독일어: Der Weg zurück)을 완성한 후, 작품으로 얻은 상당한 부를 가지고 스위스 론코에 있는 빌라(카사 몬테 타보르(카사 몬테 타보르))를 구입했다.
2. 4. 나치 탄압과 망명 (1930-1947)
레마르크는 1931년, 『귀환』(독일어: Der Weg zurück)을 완성한 후, 자신의 작품으로 얻은 상당한 부를 가지고 스위스 론코에 있는 빌라(카사 몬테 타보르(카사 몬테 타보르))를 구입했다.[14] 그는 프랑스와 그곳에서 모두 생활할 계획이었다. 1933년 5월 10일, 나치 선전부 장관 요제프 괴벨스의 주도로 레마르크의 작품은 공개적으로 "반애국적"으로 선언되었고 독일에서 금서로 지정되었다.[14] 모든 도서관에서 그의 책이 제거되었고, 독일 전역에서 판매나 출판이 금지되었다.독일은 전체주의 사회로 빠르게 몰락하면서 새로운 지배 질서에 반대하는 인구 구성원들이 대량으로 체포되었다. 레마르크는 독일을 떠나 스위스의 빌라에서 살았다. 그의 프랑스계 배경과 가톨릭 신앙도 나치들에 의해 공개적으로 공격받았다.[14] 그들은 그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을 계속 비난하며, 독일식 이름 "Remark"을 프랑스식 "Remarque"로 바꾼 사람은 진정한 독일인이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14] 나치는 또한 레마르크가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실제로 복무하지 않았다는 거짓 주장을 했다.[14]
1938년 레마르크의 독일 국적이 박탈되었다.[14] 1939년, 그는 전처와 재혼하여 그녀의 독일 송환을 막았다.[14] 유럽에서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기 직전, 그들은 스위스 포르토 론코를 떠나 미국으로 갔다.[14] 그들은 1947년에 미국 시민권을 획득했다.[15]
1943년 나치는 독일에 남아 남편과 두 자녀와 함께 살고 있던 그의 여동생 엘프리데 숄츠를 체포했다.[17] 악명 높은 인민재판소(인민재판소)(히틀러의 헌법 외적 "인민재판소"(독일어: Volksgerichtshof))에서 재판을 받은 후, 그녀는 전쟁에서 패배했다고 생각한다는 발언으로 "사기를 저하시켰다"는 죄목으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17] 재판장 롤란트 프라이슬러는 "당신의 오빠는 불행히도 우리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지만, 당신은 도망칠 수 없습니다"(독일어: Ihr Bruder ist uns leider entwischt—Sie aber werden uns nicht entwischen)라고 선고했다.[17] 숄츠는 1943년 12월 16일에 처형되었다.[17] 레마르크는 나중에 그의 여동생이 반나치 저항 활동에 참여했다고 말했다.[18]
망명 중이던 레마르크는 전쟁 후까지 여동생 엘프리데의 운명을 알지 못했다. 그는 1952년 소설 『생명의 불꽃』(독일어: Der Funke Leben)을 그녀에게 바쳤다.[19] 이 헌정은 독일어판에서는 생략되었는데, 일부 독일인들에게 그녀가 여전히 반역자로 여겨졌기 때문이라고 한다.[19]
2. 5. 전후 활동과 말년 (1947-1970)
1948년, 레마르크는 스위스로 돌아와 여생을 보냈다.[20] 《개선문》과 다음 작품인 《생명의 불꽃》(''Der Funke Leben'') 사이에는 7년의 공백이 있었다.[20] 《생명의 불꽃》은 1952년 독일어와 영어로 출판되었다.[20] 그는 《생명의 불꽃》을 집필하는 동안 《살아야 할 시간과 죽어야 할 시간》(''Zeit zu leben und Zeit zu sterben'')도 집필했다.[20] 이 작품은 1954년 《사랑할 시간과 죽을 시간》(''A Time to Love and a Time to Die'')이라는 제목으로 영어로 번역되어 출판되었다.[20] 1958년, 더글러스 서크는 레마르크의 소설을 바탕으로 영화 《사랑할 시간과 죽을 시간》을 감독했으며, 레마르크는 이 영화에서 나치를 피해 숨어 사는 존경받는 교사 역으로 출연했다.[20]1955년, 레마르크는 히틀러의 베를린 총통 관저 지하벙커에서의 마지막 날을 다룬 오스트리아 영화 《마지막 행위》(''Der letzte Akt'')의 시나리오를 썼다.[20] 이 영화는 마이클 머스마노의 책 《죽음까지 10일》(''Ten Days to Die'')을 바탕으로 했다. 1956년에는 무대극 《순환》(''Die letzte Station'')을 집필했으며, 이 작품은 독일과 브로드웨이에서 공연되었다. 《하늘은 편애하지 않는다》(''Heaven Has No Favorites'')는 1959년 《빌린 생명》(''Borrowed Life'')이라는 제목으로 연재된 후 1961년 단행본으로 출판되었고, 1977년 영화 《바비 디어필드》(''Bobby Deerfield'')로 제작되었다. 1962년에 출판된 《리스본의 밤》(''Die Nacht von Lissabon'')은 레마르크가 완성한 마지막 작품이다.
레마르크는 1925년 무용수 율타 일제 잠보나(Jutta Ilse Zambona)와 결혼했다가 1930년 이혼했고, 1938년에 그녀와 다시 결혼하여 1957년까지 함께 했다. 그는 마를레네 디트리히, 그레타 가르보 등과 염문을 뿌렸고, 1958년에는 찰리 채플린의 전처이자 여배우인 폴렛 고다르와 결혼했다. 1970년9월 25일, 스위스 로카르노에서 동맥경화증으로 인한 대동맥류로 사망하여 Ronco sopra Ascona에 매장되었으며, 1990년 사망한 아내 폴렛 고다르도 그의 옆에 묻혔다.
3. 작품 세계
레마르크는 16세에 처음으로 글쓰기를 시도했다. 초기에는 에세이, 시 등을 썼으며, 1920년에는 첫 장편소설인 『꿈의 방』(독일어: Die Traumbudede)을 출판했다.[12] 1923년부터 1926년 사이에는 콘티넨탈 AG(콘티넨탈 AG)에서 발행하는 잡지에 만화 시리즈 『Die Contibubende』(독일어)를 연재하기도 했다.[12]
전쟁에서 돌아온 후, 레마르크는 전쟁의 참혹함과 어머니의 죽음으로 큰 정신적 충격을 받았다. 그는 어머니를 기리기 위해 자신의 중간 이름을 "파울"에서 "마리아"로 바꾸었다.[5] 또한, 1929년 소설 『서부 전선 이상 없다』(독일어: Im Westen nichts Neuesde)를 출판할 때, 자신의 성을 이전 철자(Remark)에서 Remarque로 변경하여 『꿈의 방』과의 연관성을 없애려 했다.[13]
1927년, 레마르크는 소설 『지평선의 역』(독일어: Station am Horizontde)을 스포츠 잡지 『Sport im Bildde』(독일어)에 연재했다. 이 소설은 1998년에야 책으로 출판되었다.[3] 같은 해, 그의 대표작이자 인생을 바꾼 작품인 『서부 전선 이상 없다』를 집필했다. 이 소설은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군 병사들의 참혹한 경험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여 출판 즉시 국제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20세기 문학의 획기적인 작품으로 평가받는다.[3] 특히 전쟁에 대한 참전 용사들의 글쓰기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서부 전선 이상 없다』의 성공 이후, 레마르크는 이와 유사한 여러 작품을 발표하며 전쟁과 전후 독일의 모습을 묘사했다. 1931년에는 『귀환』(독일어: Der Weg zurückde)을 완성했다.[14] 그러나 1933년, 나치 선전부 장관 요제프 괴벨스는 레마르크의 작품을 "반애국적"이라고 공개적으로 비난하며 독일 내에서 금서로 지정했다.[14]
주요 작품 목록:
- Die Traumbude. Ein Künstlerromande (1920); 한국어 번역: ''꿈의 방(The Dream Room)''
- Gamde (1924년 집필, 1998년 출판)
- Station am Horizontde (1928); 한국어 번역: ''지평선의 역(Station at the Horizon)''
- Im Westen nichts Neuesde (1929); 한국어 번역: ''서부 전선 이상 없다(All Quiet on the Western Front)'' (1929)
- Der Weg zurückde (1931); 한국어 번역: ''귀환(The Road Back)'' (1931)
- Drei Kameradende (1936); 한국어 번역: ''세 친구(Three Comrades)'' (1937)
- Liebe deinen Nächstende (1939); 한국어 번역: ''표류(Flotsam)'' (1941)
- Arc de Triomphede (1945); 한국어 번역: ''개선문(Arch of Triumph)'' (1945)
- Der Funke Lebende (1952); 한국어 번역: ''생명의 불꽃(Spark of Life)'' (1952)
- Zeit zu leben und Zeit zu sterbende (1954); 한국어 번역: ''살 때와 죽을 때(A Time to Love and a Time to Die)'' (1954)
- Der schwarze Obeliskde (1956); 한국어 번역: ''검은 오벨리스크(The Black Obelisk)'' (1957)
- Der Himmel kennt keine Günstlingede (Geborgtes Lebende으로 연재됨) (1961); 한국어 번역: ''하늘은 편애하지 않는다(Heaven Has No Favorites)'' (1961)
- Die Nacht von Lissabonde (1962); 한국어 번역: ''리스본의 밤(The Night in Lisbon)'' (1964)
- Das gelobte Landde (1970); 한국어 번역: ''약속의 땅(The Promised Land)'' (2014)
- Schatten im Paradiesde (1971); 한국어 번역: ''낙원의 그림자(Shadows in Paradise)'' (1972)
- Der Feindde (1931); 한국어 번역: ''The Enemy'' (1930–1931); 단편 소설
- Der letzte Aktde (1955); 한국어 번역: ''The Last Act''; 각본
- Die letzte Stationde (1956); 한국어 번역: ''Full Circle'' (1974); 희곡
- Die Heimkehr des Enoch J. Jonesde (1988); 한국어 번역: ''The Return of Enoch J. Jones''; 희곡
- Ein militanter Pazifistde (1994); 한국어 번역: ''A Militant Pacifist''; 인터뷰 및 수필

3. 1. 주요 작품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는 16세에 글쓰기를 시작하여 에세이, 시, 소설 등을 썼으며, 1920년에는 첫 장편소설 『꿈의 방』(독일어: Die Traumbude)을 출판했다.[12] 전쟁 후, 그는 어머니를 기리기 위해 중간 이름을 "마리아"로 바꾸고,[5] 『서부 전선 이상 없다』(독일어: Im Westen nichts Neues) 출판 시에는 이전 성 철자로 되돌렸다.[13] 1927년에는 소설 『지평선의 역』(독일어: Station am Horizont)을 출판했고,[3] 같은 해 『서부 전선 이상 없다』를 집필했다. 이 작품은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군 병사들의 경험을 묘사하여 국제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며,[3] 전쟁 문학의 새로운 장르를 개척했다.레마르크는 『서부 전선 이상 없다』의 성공 이후, 전쟁과 전후 독일의 모습을 묘사한 여러 작품을 발표했다. 1931년에는 『귀환』(독일어: Der Weg zurück)을 완성했다.[14] 1933년 나치 정권은 그의 작품을 "반애국적"으로 규정하고 금서로 지정했다.[14]
레마르크의 작품은 소설뿐만 아니라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1930년에는 『서부 전선 이상 없다』가 루이스 마일스톤 감독에 의해 영화화되었고, 이후에도 여러 차례 리메이크되었다.
주요 작품 목록:
- 《서부 전선 이상 없다》 (''Im Westen nichts Neues'', 1929년)[3]
- 《귀로》 (''Der Weg zurück'', 1931년)
- 《세 사람의 전우》 (''Drei Kameraden'', 1937년)
- 《너의 이웃을 사랑하라》 (''Liebe Deinen Nächsten'', 1941년)
- 《개선문》 (''Arc de Triomphe'', 1946년)
- 《생명의 불꽃》 (''Der Funke Leben'', 1952년)
- 《사랑할 때와 죽을 때》 (''Zeit zu leben und Zeit zu sterben'', 1954년)
- 《검은 오벨리스크》 (''Der schwarze Obelisk'', 1957년)
- 《하늘은 은총을 베풀지 않는다》 (''Der Himmel kennt keine Günstlinge'', 1961년)
- 《리스본의 밤》 (''Die Nacht von Lissabon'', 1964년)
- 《약속의 땅》 (''Das gelobte Land'', 1970년)
- 《그늘진 낙원》 (''Schatten im Paradies'', 1971년) (유고작)
4. 한국 사회에 미친 영향
4. 1. 한국과의 특별한 관계
5. 비판과 논란
6. 평가와 유산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는 1970년 9월 25일, 72세의 나이로 로카르노에서 심부전으로 사망했다.[30] 그의 유해는 스위스 티치노주 론코의 론코 묘지에 안장되었다.[31]
레마르크의 아내인 폴레트 고다드는 1990년에 사망하여 남편 옆에 묻혔다. 그녀는 유럽 연구소 설립 기금으로 뉴욕대학교에 2천만 달러를 기증했는데, 이 연구소는 레마르크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32] 또한 뉴욕시 그리니치 빌리지 캠퍼스에 "고다드 홀" 건립 기금도 마련했다.
레마르크 연구소 초대 소장은 토니 주트 교수였다.[33] 레마르크의 자료들은 NYU의 페일스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34]
1970년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 사후 그의 아내 폴레트 고다드는 1990년 사망할 때까지 그 빌라에 거주했다. 이 빌라는 폴레트 고다드의 유산의 일부로 뉴욕 대학교에 상속되었다. 뉴욕 대학교가 티치노 주에 1800만 스위스 프랑에 달하는 상속세를 납부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빌라는 주정부에 의해 압류되었다.
2010년경 주정부는 경매를 통해 빌라를 매각하려 했지만, 높은 가격과 현대화 비용 때문에 처음에는 매수자가 없었다. 그러나 2021년에 독일 부부가 카사 몬테 타보르를 평화를 증진하고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의 유산을 보존하는 장소로 유지하기를 바라며 매입했다. 이곳은 앞으로도 평화 관련 행사에 계속 사용될 것이다. 빌라는 2023년에 대대적인 보수 공사를 마쳤다.
1991년, 고향 오스나브뤼크시에서 "레마르크 평화상"이 제정되었다.
또한 1996년 오스나브뤼크에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 평화센터가 설립되어, 시와 오스나브뤼크 대학교가 공동으로 운영하고 있다. 박물관에는 레마르크의 생애와 작품에 대한 "독립 - 관용 - 유머"라는 이름의 상설 전시가 있다. 2020년 9월 25일에는 서거 50주년을 기념하여 특별전을 개최했다.
6. 1. 레마르크 평화상
1991년,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의 고향 오스나브뤼크시에서 "레마르크 평화상"이 제정되었다. 1996년 오스나브뤼크에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 평화센터가 설립되어, 시와 오스나브뤼크 대학교가 공동으로 운영하고 있다. 박물관에는 레마르크의 생애와 작품에 대한 "독립 - 관용 - 유머"라는 이름의 상설 전시가 있다. 2020년 9월 25일에는 서거 50주년을 기념하여 특별전을 개최했다.6. 2.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 평화센터
1991년, 레마르크의 고향 오스나브뤼크시는 "레마르크 평화상"을 제정했다. 1996년에는 오스나브뤼크에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 평화센터가 설립되어 시와 오스나브뤼크 대학교가 공동으로 운영하고 있다. 이 센터의 박물관에는 레마르크의 생애와 작품에 대한 "독립 - 관용 - 유머"라는 이름의 상설 전시가 있으며, 2020년 9월 25일에는 그의 서거 50주년을 기념하는 특별전이 개최되었다.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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